문화산책

정몽주와 임고서원(남한) 그리고 숭양서원[북한]

송산리 2013. 7. 16. 05:02


임고서원(臨皐書院)
기념물 제62호(1985년 10월 15일 지정)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포은로 447

임고서원은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선조 명종(明宗) 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하여 사액 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현 위치에 중건, 재사액(再賜額)되었다. 인조 21년(1643 여헌(旅軒) 장현관(張顯光) 선생을 배양하고 정조 11년(178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 선생을 추향 하였고,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16년(1879)에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영정을 보관하였다. 

1965년에 복원 하여 포은선생만 복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 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다시 배향하였으며, 묘우는 문충사(文忠祠), 내삼문은 유정문(由正門(, 강당은 흥문당(興文堂), 동협은 경의협(敬義夾), 서협은 명성협(明誠夾), 동재는 수성재(修省齋), 서재는 함육재(涵育齋), 문루는 영광루(永光樓)이며, 경내 심진각(尋眞閣)과 전사청(典祀廳)및 경내에는 포은선생 신도비(神道碑), 단심가비(丹心歌碑), 백로가비(白鷺歌碑)등이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 현 임고면 우항리에서 일성군 운관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등을 거쳐 성균대사성,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가 되어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대명외교에도 큰 공을 세웠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지조로 추앙되었고 시문,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삼은의 한사람으로 기울어져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왕 4년(1392)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조선 태종 원년(1401) 영의정에 추중되었고 익양 부원군에 추봉 되었으며 문충의 시호가 내려졌다.

임고서원 전경

 

 

임고서원 은행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63호 : 1985. 10. 15 지정)

높이 20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5.95m에 이르는, 나이가 약 500년의 은행나무로서 생육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노거수이다. 수관 폭은 동서방향으로 약 22m, 남북방향으로 약 21m에 이르고 있다.이 나무는 본래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었을 당시 그 곳에 심겨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임고서원을 이곳에 다시 지으며 옮겨 심은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홍문당에서 내려보는 영광루

 

                                                                                                                       문충사

 

 

  선죽교(2008년 8월 7일 14시 촬영)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로 변경 되었다.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다.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 1) 송도(지금의 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것으로 추정된다. 길이 8.35m, 넓이 3.36m의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다리이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4)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였다, 선죽교는 1392년(조선 태조 즉위년) 정몽주가 후에 태종이 된 이방원의 일파에게 피살된 장소이기도 하다, 원래 선지교라 불렸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 하여 선죽교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은 통행을 제한하는대신 행인을 위하여 바로 옆에 좁은 돌다리를 가설 하였다, 다리옆에 비각 안에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서 있다, 또 선죽교 서쪽으로 정몽주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숭양서원(북한 국보 128)과 표충비가 있다  

 

 

 

 돌다리 바닦에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고 설명하는 북한 안내원 (길게 흘러간 검붉은 부분)

  표충비 : 선죽교 옆에 설치된 비로 오른쪽비(높이 3.17m)는 1740년에, 왼쪽비(높이 3.58m)는 1872년에 세운것으로 두 비에는 고려 왕조에 대한 정몽주의 충의와 절개를 찬양하는 내용들이 새겨져 있다. 정몽주를 내세워 사람들속에서 봉건적 충의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세운것이다

 

 

 북한 개성에있는 숭양서원[崇陽書院]으로 들어가는 외삼문(2008년 8월 7일 촬영)

 

숭양서원[崇陽書院] 

지정번호 :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8호

소 재 지  : 개성시 선죽동 

시대 및 종류 : 조선시대 서원

 

북한의 사적 제51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8호로 변경되었다. 선죽동 자남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1573년(선조 6) 개성유수 남응운(南應雲)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서경덕(徐敬德)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개성 선죽교 위쪽 정몽주의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문충당(文忠堂)이라 하였다. 1575년(선조 8) ‘숭양(崇陽)’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 국가 공인한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668년(현종 9) 이후 김상헌, 김육(金堉) ·조익(趙翼) ·우현보(禹玄寶) 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경내에는 사당, 강당, 동·서재, 내·외삼문이 있다. 

출입문인 외삼문은 5단의 높은 장대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민도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특이한 점은 정면과 후면의 주춧돌을 다르게 사용했는데 정면에는 장방형, 후면에는 원형으로 다듬어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마당 안쪽에 강당이 있고 그 앞 양쪽에 동재와 서재가 마주 서 있다.

강당은 높은 기단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3칸의 민도리계 팔작지붕집이다. 3칸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이 1칸씩 있는 구조이다.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하고 내부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5칸, 측면 2칸의 민도리계 맞배지붕집이다. 내삼문으로 들어가면 문충당이라고 하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민도리계 맞배지붕집이다. 2칸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1칸 온돌방이 있는 구조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제외된 47서원의 하나로 남아 선현을 봉사(奉祠)하고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 건축된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 형식과 구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글 [네이버 지식백과] 숭양서원 [崇陽書院] (두산백과)

 

숭양서원 전경

 

숭양서원에서 문충당(사당)으로 올라가는 내삼문

이 삼문은 중앙을 1문으로 하고 좌 우로 똑같은 구조의 계단과 문으로 건축되어있다  즉 각각 독립된 삼문이다

문충당에서 본 내삼문 중앙 그리고 좌 우에 각각 따로 문이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문충당(사당) 

포은 정몽주 선생 영정(사진 위)과  위패(사진 아래)

지금은 갈 수 없는 숭양서원 이제 곧 다시 볼날이 있으리라~

 

팔공산 은해사 에서 몰카에 잡힌 제모 ㅎㅎㅎ  두 기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