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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해발 793.5m 전북 김제) 단독산행

송산리 2019. 1. 7. 06:13

2019년도 첫 산행으로 모악산을 김제 금산사코스로 정상까지 약 12km 산행을했다

  정상엔 각종 통신시설이 주둔하고있어 낮동안만 정상을 올라설 수 있다 그리고 건물 옥상에 올라 사방을 조망한다

논산에서 10시경 자동차로 65km를 달려 금산사입구 주차장에 11시경 도착 산행 출발 ~ 심원암코스로 14시경 정상에올라 모악정코스로 하산 16시경 금산사에도착 40여분간 사찰 관람을하고 17시경 주차장에도착 자동차로 달려 18시10분경 귀가했다

            모악산 금산사 일주문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이 부도군의 3번 부도비가 보물 제24호로 지정된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이다. 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운 것이다.
현재 탑비는 귀부와 비신만이 남아 있고 비의 머리부분은 결실되었다. 대리석의 비신은 높이 2.78m, 너비 1.5m로서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은 판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 『해동금석원』등에 그 내용이 전한다. 비문의 글씨는 약 2cm의 크기로 구양순의 해서체인데 활달하고 쾌적한 멋을 지녔다. 비의 앞면에 43행 77자씩으로 스님의 출생과 교화활동, 입적 등을 적었으며 그 둘레는 당초문으로 장엄했다.
서자(書者)와 찬자(纂者)의 이름은 판독할 수 없고 각자(刻者)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해동금석원』에 의하면 이오가 짓고 정윤(鄭允)이 썼으며 비음(碑陰)은 채추탄(菜推誕)이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금속고』에서는 비음을 채추탄이 쓴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귀부는 방형의 지대석위에 놓였는데 신체는 장대하나 머리는 작은 편이다.
등에는 육각의 갑문(甲文)을 새기고 등위에 비신을 얹는 삽입부를 마련했다.역동적인 발과 비늘의 표현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여 고려시대의 탑비 가운데 우수한 작품임을 알게 한다.

                  금산사를 지나 만나는 부도전

                     부도전을 지나 심원암 삼거리에서 심원암코스로 정상에올라 모악정코스로 하산하면 이곳으로 원점회귀다

                                                                                    심원암(深源庵)

심원암은 신라 36대 혜공왕 당시 진표 율사가 금산사를 중건 하면서 선객들의 수도 도량으로 건립한 산내 암자로서 많은 선객들이 도를 이룬 호남 유일의 선도량 이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 되었다가 인조 13년에 수문선사가 복원 하였으며 철종 원년(1847년)에 남쪽 250m 아래인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최근에 건립한 것이다. 이 암자에는 보물 제 29호인 북강3층석탑이 있으며 이 탑을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조선조때에는 서민층과 사대부집 부녀자들의 발길이 그칠새 없어 몇채의 요사채를 건립하여 이들의 불편함을 덜어주었다고 하나 현재는 옛 건물터만이 남아있다.

                                           금산사 심원암 북강삼층석탐(金山寺 深源庵 北崗三層石塔 보물 제 29호)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금산사 동쪽에있는 심원암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북강]이란 곧 북쪽의 언덕을 뜻한다, 탑의 받침부나 1층 몸체는 여러조각의 돌을 조립하여 만들어 통일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각층 지붕과 2층 이상의 몸체를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고 받침부 위 아래의 너비가 일정한 것으로 보아 고려탑의 성격을 담고 있다, 층마다 지붕은 넓고 경사가 급해 전체적인 안정감이 덜하며 곳곳을 장식한 조각기법도 거칠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하여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정상 600m전방  헬기장

    헬기장에서 바라본 모악산 정상

  완주군 구이면 구이저수지

북봉(앞 헬기장) ~ 매봉 그리고 멀리 구성산과 그 뒤 황산이 조망된다  

미세먼지로 조망이 짧지만 왼쪽이 남봉이고 그 능선을 따라 화율봉이다

 

 

 

                    하산길 모악정

     금산사 전경

 

                                                                  대적광전(大寂光殿)

이 법당(法堂)은 수계(受戒), 설계(設戒), 설법(說法)등 사원(寺院)의 중요(重要)한 의식(儀式)을 집행(執行)하는 곳이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은 본래(本來)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이었다,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으로 불리던 때에는 이곳에 법신비로자나불(法身毘盧蔗那佛), 보신노사나불(報身盧舍那佛), 화신석가모니불(化身釋迦牟尼佛)등 삼신불(三神佛)만을 봉안(奉安)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年때 경내(境內)의 모든 전각(殿閣)이 소실(消失)된 후(後) 인조(仁祖) 13年 1635年에 이르러 도량(道場)을 재건(再建) 하였는데,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과 극락전(極樂殿), 약사전(藥師殿)에 봉안(奉安)하고 있던 5여래(如來) 6보살(菩薩)을 다시 조상(造像)하여 모두 한자리에 봉안(奉安)하고 현액(懸額)을 대적광전(大寂光殿)으로 바꾸었다.

1986年 원인모를 화재로 법당이 전소되어 보물(寶物) 第476號 지정(指定)이 해제(解除)되었으나, 1990年에 원래(元來)의 모습대로 복원(復元)하였다

                                                                 석등(石燈 寶物 第 828號)

법당(法堂)앞을 밝히는 등(燈)불로 인등(引燈), 장명등(長明燈) 이라고도 한다. 이 석등(石燈)은 호강암(花崗岩)으로 만든 높이 3.9m의 고려시대(高麗時代)의 각품(作品)으로 1922年 대장전(大藏殿)을 이정(移轉)할 때 현위치로 옮겼다. 방형판석(方形板石)을 지대석(地臺石)으로 하대(下臺)는 원형(圓形)인데 복련(伏蓮)으로 장식(粧飾)하였다. 간석(竿石)은 팔각형(八角形)이며 각(各)모서리마다 선(線)을 쳐서 우주(隅柱)인 듯이 강조(强調)하였다, 상대(上臺)는 앙련(仰蓮)으로 장식(粧飾)하였다. 화사석(花絲石)과 개석(蓋石)은 팔각형(八角形)이며 개석(蓋石) 정상(頂上)에는 원대(圓臺)를 두어 상륜부(相輪部)를 받들게 하였다.

                                             대장전(大藏殿 보물 제 825호)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만 열거하면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노주(露柱 寶物 第 22號)

이 석조(石造) 건조물(建造物)은 그 용도(用途)를 알 수 없는 유물(遺物)이나 그 형태(形態)가 방형(方形)의 연화대(蓮花臺)처럼 조성(造成)된 특이(特異)한 석조물(石造物)임에 착안(着眼)하여 노주(露柱)라고 부르고 있다. 석조(石造) 건조물(建造物)의 구조(構造)는 상(上), 중(中),하(下) 삼단(三檀)으로 구성(構成)되어 있는데, 각(各) 단(壇)마다 안상(眼象)과 화형문(花形紋) 그리고 상대석(上臺石) 위에는 일반(一般) 석탑(石塔)의 상륜부(相輪部)와 유사(類似)한 양식(樣式)이 조각(彫刻)되어 있는데 상륜부(相輪部)가 원형(圓形)이며 보주(寶珠) 사이는 간주(竿柱) 형식(形式)인 것이 매우 특이(特異)하다, 연봉형(蓮峯形)인 부주(寶珠)의 조상(造像) 기법(技法)으로 보아 고려(高麗) 초기(初期)의 작품(作品)일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육각다층석탑(六角多層石塔 보물 제 27호)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석련대(石蓮臺 보물 제 23호)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이 석련대를 대개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을 때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석련대의 경우는 충분한 역사적 정황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오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 25호)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방등계단 사리탑(方等戒壇舍利塔 보물 제 26호)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미륵전(彌勒殿 국보 제 62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금산사에 있는 3층의 불전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이다. 1층과 2층은 각각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었다. 기둥 사이에는 모두 공간포를 하나씩 두었고 공포는 안팎 모두 2개의 출목으로 되고 내출목은 간단한 초기의 운공(雲工)으로 되어 있다. 이 건물에서는 고층건물의 안전도를 높이기 위해 각 추녀는 높은 기둥에 연결되고 뒷몸을 파서 박은 후 비녀장을 질러 빠져나지 못하게 했고, 가운데 도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동자기둥(童子柱)을 세워주는 등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