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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대사탑비(국보 제 315호) 그리고 지증대사탑(보물 제 137호). 정진대사탑비(보물 제 172호)

by 송산리 2016. 5. 18.

2016년 5월 14일 석가타신일에 찾은 경북 문경 봉암사

봉암사 지증대사탑비(鳳巖寺 智證大師塔碑 국보 제315호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이 비()는 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암사를 처음 건립한 지증대사(智證大師)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신라 경애왕(景哀王) 원년(924)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신라 말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지었으며, 글씨는 분황사의 승려 석혜강(釋慧江)이 썼다. 용 모양의 비머리와 귀부(龜趺)를 완전히 갖춘 비석으로 귀두는 용두형화(龍頭形化)되었으며 사산비문(四山碑文)으로 널리 알려진 비이다. 지증대사는 속성이 김씨(金氏)이고 호는 도헌(道憲)이다. 신라 헌강왕(憲康王)16(824)에 출생하여 17세에 부석사(浮石寺)로 출가하면서 승려가 되었다. 그가 헌강왕 8(882)에 봉암사에서 향년 59세로 돌아가자 나라에서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고 탑호를 적조(寂照)라 하는 동시에 탑비(塔碑)를 세우도록 하였다.

 

봉암사 지증대사탑(鳳巖寺 智證大師塔 보물 제137호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이 탑에는 봉암사를 처음 건립한 지증대사(智證大師. 824~882)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이 탑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8(882)에 세워졌으며, 여러장의 판석(板石)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부의 장식 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되어 신라 사리탑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탑의 높이는 3.41m, 지대석 너비 2.28m의 당당한 탑이다. 지증대사는 경주김씨로 17세에 부석사(浮石寺) 경의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헌강왕(憲康王) 7(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시양하고 봉암사로 들어와 이듬해인 동왕 8(882)에 세상을 떠났다. 헌강왕은 대사의 시호를 지증, 탑호는 적조 라 내렸다

 

봉암사 정진대사탑비(鳳巖寺 靜眞大師塔碑 보물 제172호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이 비는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 정진대사(878~956)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고려 광종 16(955)에 건립된 탑비이다. 이 탑비는 높이 2.73m, 1.64m, 두께 0.26m로 고려 초기의 조형미를 잘 나타내며, 귀부와 이수의 형식은 일반적인 방식을 취했으나 비좌가 두드러지게 큰 것이 특징이다. 필체는 구양순체 해서이며,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몽유가 지었다. 대사는 지금의 충남 공주 출신으로 성은 왕씨이다. 신라 효공왕 4(900)에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였고 경애왕 원년(924) 7월에 돌아와 봉암사에 자리잡았다. 경애왕은 그를 상당히 예우하였으며, 고려 태조, 혜종, 정종도 그의 학식을 존경하였고 광종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를 맞이하여 사나선원에 모시고 보살로 예우하였다. 그는 광종 4년 봉암사에 들어가 9658월에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고 왕은 사신을 보내어 법호를 내려 정진이라 하고 탑의 이름을 원오라 하였다.


봉암사 금색전 내에 있는 구산선문대범종(九山禪門鳳巖寺大梵鐘)

 

 

 

 

 봉암사 백운계곡에있는 고려시대 마애불좌상

 

 마애불 부근 바위에 최치운이 새겼다는 "백운대"